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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을미사변에 대해

by 바이슨이 2020. 12. 13.



1.오류와 왜곡 우리가 기억하는 을미사변에 관해 말할때 당시 왕비에 관한 여러 호칭이 있는데, 우선 명성 이란 용어는 시호이므로 안붙이고 민비,민황후라고 해도 무방하나 이미 주어진 시호를 붙여주는게 예의라고 생각하며 비? 황후?중 어느것일까? 이는 대한제국 건국으로 황후로 추존되었으니 이 또한 올바른 표현은 황후가 될테니 결국 명성황후가 옳다 한편 매우 심각한 왜곡이 아직도 만연한데 시해 라는 용어이다 시해에서 시는 (윗 사람을)죽일 시 자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하가 왕을 죽일 시' 또는 자식이 부모를 죽일 시'라는 의미인데 당시 조선백성의 국모요 왕과 대칭되는 왕비이니 시 를 쓰면 우리가 죽였다는 의미가 되어 심각한 왜곡이므로 포괄적 글자인 살을 사용하는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예를들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대통령을 시해했다 라는 말을 생각하면 쉽게 다가온다 한편 낭인들에게 살해됐다고 할때 낭인이란 메이지시대 초기에서 2차 세계대전 종전때까지 중국대륙, 유라시아대륙 시베리아,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각지를 방랑하며 각종 정치활동을 벌이던 일본인 무리를 가리키는 말인데 '대륙'을 뺀 '낭인"이라 하면 '떠도는 사람' 이란 뜻으로 깡패,불량배등이 연상되니 마치 그런 자들에게 왕비가 살해당했다는 허약한 나라 조선을 암시하는 말이 된다 하물며 을미사변에 참여한 낭인집단엔 하바드대학,소르본느대학을 졸업한 자와 교장,퇴역군인,기자들로 구성된 에리트 집단이였음이 재러사학자 최문형교수가 이미 10여년전에 외교문서에 밝혔듯이 낭인에 대해 제대로 인식해야할 필요가 있다 2.새로운 실마리 2009년 재일교포 2세로 양심적인 사학자 김문자는 명성황후 살해 배후가 일본 군부이며 직접적인 살해자는 미야모토 다케타로 육군소위로 지목했다 하지만 이후 사건 당일 어디서 어떻해 진행됐는가에 대한 자세한 연구가 없었다 그 이유로는 첫째 사건현장인 건청궁 내부를 정확히 몰랐기 때문이고 둘째는 당시 여러 보고서중 현장에서 목격한 사바친의 증언과 보고서를 본격적으로 분석하지 못해서이다 당시 사바친은 사건현장에서 매 시간마다 사건추이를 확인했고 5시 넘어서는 15분 단위의 상세한 상황을 파악했다 하지만 당시 사바친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건에 둘러 싼 인물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을 하지 않았다 1895년 10월8일(양력) 새벽4시 사바친은 옆 방의 시위대 교관 다이장군과 함께 시위대 1대대장 참령 이학균의 다급한 소리에 잠을 깻다 200여명의 훈련대가 4~5명의 일본교관 지휘로 춘생문을 둘러쌌고 30명의 군복착용자를 포함한 50~60여명 일본인이 추성문 성벽에 숨었다고 알려줬다 이후 이학균은 보다 정확한 현 상황을 파악하여 계무문으로 가서 망원경으로 관측결과 북서쪽 궁장을 따라 움직이는 12명의 그림자를 확인후 고종의 거처인 장안당으로 행했고 다이와 사바친은 궁궐의 당직실로 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새벽 5시15분 훈련대와 일본인은 계무문을 통과하여 무청문(이곳에서 장안당 입구인 필성문까지는 50m)에 도달했다 다이의 지휘아래 필성문 주변엔 300여명의 시위대가 정렬했다 침입자들은 무청문의 1~2인치 폭의 5~6개 틈사이로 시위대 6m위 허공을 향해 한번에 30~40발씩 3회 위협사격했다 첫 사격이 시작되자 시위대는 총과 군복을 벗고 두 갈래중 한 무리는 관문각으로 도망갔는데 일본인이 쫒지는 않았다 또 다른 한 무리는 필성문 쪽으로 밀려와 사바친은 시위대,시종,관료들 300여명과 왕비의 침소로 통하는 문까지 왔다 사바친은 장안당을 돌아 관문각을 지나 왕비의 침소인 정시합 정면 담장에 있는 일각문에 몸을 숨겼으나 다시금 녹원으로 향하는 청휘문옆 곤녕합 동행각의 문으로 피했다 이때 대부분 시위대는 이곳을 통과하며 도망갔지만 사바친은 곤녕합 동행각에서 사건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3.사건현장 1명의 일본장교와 5명의 일본군 병사 그리고 칼을 든 20~25명의 자객들과 40명의 훈련대는 장악한 곤녕합에 모였다 동시에 청휘문과 일각문에 2명씩 일본군이 배치되고 1소대 40명 훈련대는 곤녕합 마당에 총을 내리고 정렬했다 이때 90cm정도의 긴 칼을 차고 59cm정도의 단검을 빼든채 단정한 양복을 입은 4~5명의 자객이 현장을 지휘했다 한편 오카모도의 지휘아래 20~25명의 자객들은 건물내부를 샅샅이 뒤지며 왕비를 찾고 다녔다 이 과정에서 궁녀들이 머리채를 잡힌채 끌려나와 왕비의 소재를 추궁할때 또 다른 일부 자객은 왕비의 소재를 대답하지 않는 궁녀 10~12명을 옥호루 아래로 던져 버렸는데 그녀들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불과 5~10m거리에서 사바친이 목격했다 순간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사바친은 일본장교에게 보호받는것이 최상이라 여겨 용기를 내어 다가가 영어로 얘기 했으나 못알아 들어 짧은 일어로 다시 얘기하자 그 일본장교(미야모토 훈련대교관)는 모르는척 다른곳으로 가버렸다 이에 다른 일본병사에게도 접근했으나 무시를 당하자 다급해진 사바친은 현장 총지휘자인 오카모도에게 아침인사를 하며 접근하자 이름과 직업을 냉정한 어투로 물어본후 '당신은 보호되었고 이곳에 머물라"고 명령했다가 5시45분 훈련대 군인 2명에게 사바친을 데리고 나가라고 명령하자 건청궁 뒤쪽 복수당을 지나 관문각과 장안당을 지나면서 일본군과 장교, 한국관료들을 목격하며 6시쯤 광화문을 나섰다 라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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