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뒤처리 곤령합에 침입한 폭도들은 왕세자,궁녀,시위대,사바찐 등에게 다그치면서 왕비를 찾기 위해서 광분했다. 30분이 지나도 왕비를 찾지 못하자, 폭도들은 곤녕합 내부에서 살해된 여인의 시신을 다시 점검했다. 그 과정에서 곤령합 내부에서 살해된 시신을 모두 옥호루로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왕비가 관자놀이 부분에 벗겨진 자국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그런 시신을 발견했다. 6시 10분, 곤령합 주변의 궁녀는 옥호루에서 왕비의 시신을 확인한 뒤 왕비의 얼굴에 수건을 덮어주었다. 왕비의 사망을 확인한 일본공사관 부무관 오카모토 등은 고종과 왕세자를 장안당으로 이동시켰다. 이미 고종은 일본공사관 오기와라 경부에게 맡겨져 폭도들의 접근을 피하게 하였다. 사후 처리를 맡은 오기와라는 왕비의 시신을 건청궁 주변 녹원으로 옮겨서 시신을 불태울 것을 지시했다. 폭도들은 왕비의 시신을 확인후 곤령합에서 홑이불로 싸서 송판 위에 올려 녹원으로 옮겼다. 왕비의 시신 위로 석유를 붓고 땔나무를 그 위에 얹어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신을 태웠다. 뮈텔 주교는 왕비의 시체가 어제 죽은 궁녀들의 시체와 함께 불태워 졌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죽은 시위대 병사의 시신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어떤 궁녀는 한 궁궐 관리가 일본인들이 왕비의 시체를 태우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현장을 목격한 그 궁궐 관리는 현흥택이었다. 현흥택은 왕비의 시신을 녹원에서 불태운다는 소식을 듣고 그 곳으로 달려갔다. 그는 녹원에서 여인의 옷이 불타고 있는 것을 목격했고 그 사이로 왕비의 시체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 날 새벽 녘 훈련대 참위 윤석우는 녹원 근처 시체가 타는 것을 목격했다. 오후 윤석우는 훈련대 대대장 우범선에게 군주가 계신 근처에서 시체를 불살렀으니 남은 해골을 존엄 근처에 두는 것이 불가하다고 보고했다. 우범선은 그 땅을 정하게 쓸고, 남은 해골이 있거든 연못 속에 던져라고 윤석우에게 지시했다. 하지만 윤석우는 타다 남은 해골을 거둔후에, 후원의 오운각 서쪽 산 아래 몰래 묻었다. 오랫동안 명성황후 살해범으로 폭도들이 낭인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을미왜란의 배후를 추적해보면 살해범으로 일본군부로 강력히 추정된다. 당시 외교사료를 살펴보면 주한 일본공사관 경부 오기와라가 명성황후 시신 처리를 주도했다. 또한 당시 증언에는 주한 일본공사관 순사 와타나베가 곤령합에서 왕비를 마지막으로 추적했다. 추정 살해범의 주요인물은 주한 일본공사관의 경부와 순사이므로 일본정부가 관여한 것이다. 당시 외국인 사이에서도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사건의 진상과 달리 흉흉한 추측이 난무했다. 그 중 러시아 육군중장 운떼르베르게르의 1897년 한국방문 보고서에는 녹원에서 타다 남은 뼈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머리 앞부분과 팔부분의 뼈가 땅속에 움푹 들어간 채 발견되었다고 기록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부상을 입은 왕비가 머리와 팔로 불을 피해 땅속으로 파고 들어갔다는 사실을 추측했다. 심지어 왕비의 최후 중 그동안 학계까지도 시간설에 관한 논란이 존재했다. 1964년 야마베는 소위 '에조보고'를 근거로 왕비의 시간설을 제기했다. 에조보고서는 갑오개악 이후 한국 내각고문관에 임명된 이시쯔카 에조가 을미왜란에 대해서 일본 법제국장 스에마쯔에게 보낸 보고서를 의미한다. 이시쯔카 에조는 왕비의 살해과정에 대해서 참가자들은 깊이 안으로 들어가 왕비를 끌어내고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히고 나체로 만들어 국부검사를 하고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태워버리는 등 참으로 이것을 쓰는 것조차 차마 못할 일입니다고 기록했다. 당시 외교사료, 회고록, 증언을 살펴보면 이시쯔카의 현장 목격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변에 참가한 일본인의 이야기를 듣고 이시쯔카가 보고서를 작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이시쯔카 보고서의 신빙성이 높지 못하다. 또한 곤령합에 침입한 일본자객은 동이 틀 무렵 왕비의 시체를 확인했기 때문에 빠른 시간 내에 왕비의 시신을 처리하고 철수해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시신을 유린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현장에서 낭인을 직접 지휘한 오카모토는 왕비 한 명의 암살에 모든 초점을 맞추도록 유도했다. 오카모토는 그 이외의 불필요한 살해를 막는데 노력했다. 그런데 당시 낭인이 왕비의 시신을 이동시키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시신의 옷도 일부 노출되었다. 따라서 그런 상황을 두고 낭인이 과장해서 국부검사라는 표현까지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명성황후의 암살과정, 명성황후의 살해인물 등의 논란이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논란의 중심에 폭도(낭인)들이 있었던 것은 일본정부가 왕비살해 책임의 본질을 흐린 것이다. 한국인조차도 명성황후 암살사건을 희화화시키려는 일본의 의도에 말려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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