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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회 - 외세의 침략 그리고 개항 근대화를 이끌고 자주적인 지위를 획득하기 위하여 19세기 후반부터 그려진 민족사를 이해하고 우리나라 민족이 노력한 부분들에 대해 이해하고자 한다. 조선시대의 말기에는 평등사회를 위한 신분 질서가 해체되었다. 또한 실학과 한글 소설 보급 등으로 서민계층의 수준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목차 1. 당시 세계의 흐름 2. 내부 통치를 위한 체계 정비 및 부작용 3. 통상 거부 정책과 그 결과 당시 세계의 흐름 19세기 후반 세계의 흐름은 제국주의가 도래하였는데 이는 민족주의가 높아지고 자본주의가 발전한 결과이다. 중국에서는 반제국주의 운동이 고조되고 근대화 운동이 함께 진행되고 있었다. 또한 일본도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 운동이 적극적으로 추진되는 상황이었다. 서양의 근대화 선점으로 제국주의를 동반한 침략으로 .. 2021. 5. 3.
을미왜변 사건의 뒤처리 곤령합에 침입한 폭도들은 왕세자,궁녀,시위대,사바찐 등에게 다그치면서 왕비를 찾기 위해서 광분했다. 30분이 지나도 왕비를 찾지 못하자, 폭도들은 곤녕합 내부에서 살해된 여인의 시신을 다시 점검했다. 그 과정에서 곤령합 내부에서 살해된 시신을 모두 옥호루로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왕비가 관자놀이 부분에 벗겨진 자국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그런 시신을 발견했다. 6시 10분, 곤령합 주변의 궁녀는 옥호루에서 왕비의 시신을 확인한 뒤 왕비의 얼굴에 수건을 덮어주었다. 왕비의 사망을 확인한 일본공사관 부무관 오카모토 등은 고종과 왕세자를 장안당으로 이동시켰다. 이미 고종은 일본공사관 오기와라 경부에게 맡겨져 폭도들의 접근을 피하게 하였다. 사후 처리를 맡은 오기와라는 왕비의 시신을 건청궁 주.. 2020. 12. 14.
을미사변에 대해 1.오류와 왜곡 우리가 기억하는 을미사변에 관해 말할때 당시 왕비에 관한 여러 호칭이 있는데, 우선 명성 이란 용어는 시호이므로 안붙이고 민비,민황후라고 해도 무방하나 이미 주어진 시호를 붙여주는게 예의라고 생각하며 비? 황후?중 어느것일까? 이는 대한제국 건국으로 황후로 추존되었으니 이 또한 올바른 표현은 황후가 될테니 결국 명성황후가 옳다 한편 매우 심각한 왜곡이 아직도 만연한데 시해 라는 용어이다 시해에서 시는 (윗 사람을)죽일 시 자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하가 왕을 죽일 시' 또는 자식이 부모를 죽일 시'라는 의미인데 당시 조선백성의 국모요 왕과 대칭되는 왕비이니 시 를 쓰면 우리가 죽였다는 의미가 되어 심각한 왜곡이므로 포괄적 글자인 살을 사용하는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예를들어 김재규 .. 2020. 12. 13.
정조 류철균-이인화 한 인물에 낯설은 이름과 낯익은 이름이 공존했다. 하나는 본명 하나는 필명 이었다. 그에 의해서 옛날 일이 떠올랐다. 1990년대 한 인물의 신화가 시작되었다. 그가 출판한 소설 때문이다. 1993년 소설 영원한 제국의 출간과 성공을 계기로 정조는 교과서와 연구자의 품을 떠나 개혁과 지도력을 상징하는 인기 높은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현재의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 1990년대 국부 감을 갖지 못한 남한에서 정조를 통해 결핍 감을 보상받으려는 심리는 은밀한 욕구였다. 200년 넘게 떨어져 있던 정조는 누구에게나 적절한 변주를 허락하는 매력적인 소재이기도 했다. 영원한 제국이 누군가에 대한 향수를 자극할 수도 반대로 개혁적 지도자와 음험한 보수의 대결로 독해 될 수 도 있었다. 하지만 정조는 다.. 2020. 12. 13.